무제 문서

 * Beautiful ones *  *  
  Talking About  :   * 지금 우리의 시절 나에게
  Name  :  soho



누군가 내게
지금 너는 무얼 하고 있느냐 물으면
나는 그저 이 곳에 있을 뿐이라고
잠시 꿈에 빠져 착한 너를 만나고
일어나 앉은 깊은 밤엔 또한 망연히
돌아오지 않을 너를 생각하며
잠시 울었다가 먼 하늘을 보며 시간을 내어주고
빈 손과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을 뿐이라고

새벽 한 시
새로운 음성 메시지가 한 개
있습니다 ‘회사가. 부도가. 났다. 잘. 살아라.’
출렁이는 목소리
월급을 반납하고 집을 담보로 전 재산을 회사를 위해 박았다며
총총히 술잔을 비우던 너는
깎아지른 바위에 온몸을 부딪히며
바다에 섰느냐
소식은 먼 길을 와서 눕는구나
돌기마다 혓바늘이 돋아 또한 붉다  
피곤하겠구나
차마 아내에겐 보일 수 없었던 소리 없는 울음이
잡음 없이 전해진다
몇 번을 재생해 보아도 깨끗하고 명백한
울렁, 비릿하고 젖은 것이 속을 뒤집는다  
소리 없는 것들이 왜 이리도 많으냐
소리 없는 것들은 왜 이리도 깊으냐
우리가 귀를 잃어
진정 길을 잃은 게냐

한때는 사랑하였으리라
복권을 사며 꿈을 꾸고 술잔 앞에 선연히 피어
별도 헤아렸으리라
말없이 걸어와서 흔적 없이 돌아서는 계절 같은 것일 뿐이었대도  
희망도 몇 번은 와서
낙엽 타는 냄새 구수하고 쌓인 눈은 따듯하기도 했으리라

누군가 내게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면
나는 어디에도 없고
너희,
거처도 모르고
그저 멈춘 듯 흐르는 하늘과 부는 듯 잠 자는 바람,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이별들과
소리 죽여 어깨를 흔드는 우리의 시절만
무수하게 무수하게 쌓이고 쌓여
겨울은 오고
봄은 또 오는 끝없는 길만 있을 뿐이라고

새벽 세 시
새로운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다 전송 실패
어떤 종류의 이별
어떤 종류의 절망 앞에서도
돌아가는 법을 모르는 나를
무엇도 기다리지 말 것이며
시절아,
묻지 말기를





개개비   2004/10/10  *
장엄한 부엌=


그들이 또 달을 먹으러 왔다
여자는 달을 먹고, 다달이 배가 불렀다
젖을 짜 넣고 구운 달 위에
하늘나라 박하의 청량한 향을 첨가했다

나는 그의 부엌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흰 옷 입은 요리사들의 은밀한 지저귐
수백 개 통나무 도마 위에서
청둥오리들의 목을 내리치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장엄한 부엌이었다

아이를 동반한 손님들이 들어왔다
엄마 엄마 새큼한 별 한 잔 을 마시고 싶어
먹구름을 갈아 만든 음료에
차디찬 별을 띄워 주었다

나는 그의 부엌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밀가루 구름의 폭풍우가 피어오르고
각 죽은 짐승들의 피가 수챗구멍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가는 가운데
설거지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수많은 숟가락, 젓가락, 손가락, 발가락들의 아우성
장엄한 부엌이었다

밤참을 준비를 할 시간
달을 팬 위에 깨뜨리자
달 위에 손톱만 한 구멍이 파이더니
날개가 튀겨질 새떼가 기어 나왔다
새떼는 밤이 깊어갈수록
검은 날개를 하늘 가득 펼쳤다

침 흘리고, 씹고, 핥고, 트림하고, 질겅질겅하고, 빨
고, 맛보고, 마시고, 한시도 쉬지 않고 받아먹고, 삼키
고, 건배! 하고 외치고, 더 먹어! 하고, 이봐요! 하고, 여
기 한 병 더! 소리치고, 쩝쩝하고, 큭하고, 끄르륵하고,
캭! 하고

한번도 다물어본 적 없는 입술처럼
저 밤거리의 양쪽 건물들이
거창하게 열린 채 밤하늘을 받아먹는 소리
모두 장엄했다

-김혜순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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