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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게 김치라지만...
 soho  | 2004·10·19 09:13 | HIT : 979


어쩌면 엄마는 모임이 있기 사나흘 아니 두어 주 전부터 가슴이 뛰었는지도 몰라
늘상 맺혀있는 자식이라지만 더 그리워 더 눈물이 났는지도 몰라
우리는 웃고 떠들고 떠올리면서도 정들어가는 또 다른 자리에서
남모르게 가슴이 패이거나 싸한 고마움만 깊어가는지 몰라

모임 전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추를 좀 절여놨는데... 담궈다 주면 먹을 사람이 있을까?'
가장 엄마다운 손을 빌어 엄마는 며칠을 궁리하셨을 게 틀림없었겠지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마음같아서야 임금님 밥상이라도 차려주고 싶으셨겠지만
살아온 날들이 그렇듯 엄마의 손에서 가장 엄마답게 그리고 그 시절과 이 시절을 지내온
한 어미로서
엄마는 배추를 고르고 겉잎을 다듬고 물에 빗기고 소금을 뿌리셨겠지
무를 채 썰고 고추가루와 간 마늘을 듬뿍 쏘아붇고 오전나절 속을 만드셨겠지

예전에 예전에 지금도 그렇지만 한창 살림이 겨울때
엄마는 구멍난 아빠 런닝셔츠로 여름을 나고 우리 사형제는 구멍난 양말로 겨울을 날때
과일아니 캔 음료같은 건 구경만으로 맛을 느껴갈 때
한번은 너무 밝고 환해서 열여섯 같은 엄마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어
부엌 앞에서도 싱글싱글 수돗가에서도 벙글벙글
칼질을 하면서도 흥얼흥얼,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 내가 물었지
'엄마,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뒤돌아보며 씨익 웃던 엄마는
마치 일급비밀이라도 이야기 하는 듯한 눈빛으로 냉장고를 가르키며 말하는 거야
'사실은...'
'사실은 뭐?'
'오늘 낮에 사과를 한 상자 샀는데'
'한 상자? 무슨 돈으로?'
후후훗, 새어나오는 웃음이 개구장이 장난같기도 하고 사춘기 계집애 뺨 같기도 하더니
'좀 썩어서 팔기는 뭣하지만 맛있는 거 그런 거 있잖아 너무너무 싸게 한 상자를 산 거 있지?'

순간 그 커다란 냉장고를 소중한 편지처럼 안고서 웃고 계신 듯한 착각을 했던 거야
'아... 썩은 사과 한 상자가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구나... '

아마 그런 거였겠지?
엄마는 그때의 기분같은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 김치 속을 바르셨을 거야
엄마에게 드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부터 나는 것이지만 난 그게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
흔한 게 김치고 숱하게 오가는 것이 물질적인 어떤 것이겠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줄 무언가를 골몰하고 내 노동과 정성을 기울여 그것을 해 본지가 언젠지...
술 한잔 살께, 차 한잔 사라! 밥 사, 선물 사 줄께!
마음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참 일회적이고 비교적 심플한 말의 오감에서
나는 묵은 김치의 생내를 맡는 것 같았어
상상할 수 있겠어?
생김치의 풋풋함을 식탁 가득, 입안 가득 풍기는 깊은 빛깔의 묵은 김치...

세월 따라 손맛도 변한다지만
(사실 내 생각에 엄마의 음식솜씨가 예전보다 좀 덜한 것 같긴 하거든)
나는 어쩌면 알겠어
배추를 고르던 시간 같은 거 말이야...
시간이 갈수록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김치같은 마음 같은 거 말이야...



out sider
나도 좀 챙겨갈걸 그랬나..^^;
갑자기 그 김치를 가져올걸 후회가 생기는듯.

04·10·19 21:1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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